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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7일 대림절 둘째 주일오전예배 설교] 이사야 11장 1절-10절, 절망의 그루터기, 소망의 싹이 트다

2024년 대림절 두 번째 주일 설교문. 이사야 11장 1-10절 본문 해설. '이새의 줄기'와 '한 싹'의 의미를 통해 절망적인 현실(그루터기) 속에서 피어나는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나라를 선포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하는 진정한 샬롬의 메시지를 통해 위로를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과 정의로운 삶, 가정과 사회의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적용점을 제시합니다.


[12월 7일 대림절 둘째 주일오전예배 설교] 이사야 11장 1절-10절, 절망의 그루터기, 소망의 싹이 트다



이사야 11장 1절-10절, 절망의 그루터기, 소망의 싹이 트다



함께 할 찬송


  • 새 찬송가 101장, 이새의 뿌리에서
  • 새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



서론: 베어 넘겨진 숲, 그리고 침묵의 시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기다림'의 촛불을 켰습니다. 여러분, '대림(Advent)'은 단순히 성탄절 파티를 준비하는 기간이 아닙니다.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약속 하나만을 붙잡고 새벽을 기다리는 치열한 영적 시간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보십시오. 뉴스를 틀면 들려오는 소식들은 마치 거대한 도끼가 울창한 숲을 무자비하게 찍어 넘기는 것과 같습니다.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고, 경제적 한파는 서민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몹니다. 사회적 갈등과 혐오라는 도끼질에 우리의 마음은 황폐해졌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개인의 삶도 이와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무성한 가지를 자랑하던 나무 같았는데, 건강의 악화, 사업의 실패, 믿었던 사람의 배신, 혹은 자녀 문제라는 도끼에 찍혀 이제는 앙상한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처럼 느껴지지는 않으십니까? "이제 내 인생은 끝난 것인가? 더 이상 희망은 없는가?"라는 탄식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당시 최강대국 앗수르는 주변 나라들을 닥치는 대로 짓밟으며 유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벌목 기계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공포 앞에서, 다윗 왕조의 영광은 이제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마저 침묵하시는 것 같은 절망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그 절망의 한복판, 죽은 것 같아 보이는 그 그루터기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세상은 "끝났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잘려 나간 우리 삶의 그루터기에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대지 1. 소망은 가장 낮은 곳, '이새의 줄기'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우리 함께 1절을 읽겠습니다.

  •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다윗의 왕좌'나 '솔로몬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새의 줄기'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이새는 베들레헴 시골의 평범하고 이름 없는 촌부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화려했던 다윗 왕조의 가지가 다 잘려 나가고, 인간의 자랑과 권세가 완전히 사라져 바닥까지 낮아진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이 바닥난 바로 그 지점, 가장 비천한 뿌리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돋아난 '한 가지'는 히브리어로 '네체르(נֵצֶר)'입니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예수님이 자라나신 동네 '나사렛'과 어원이 같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실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냄새나는 말구유,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멸시받는 동네 나사렛의 목수 아들로 오셨습니다.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으셨습니다(사 53:2).

그러나 그 연약해 보이는 싹 안에 온 우주를 살릴 생명이 있었습니다. 마치 딱딱한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작은 들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절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느껴질 때, 내 힘이 빠지고 내 자랑이 잘려 나간 그 그루터기야말로, 예수의 생명이 싹트기에 가장 좋은 옥토입니다.


대지 2. 참된 왕은 스펙이 아닌 '성령의 능력'과 '공의'로 통치하십니다.

그루터기에서 난 새싹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세상의 왕들은 군사력과 재물, 혹은 뛰어난 처세술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첫째, 주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왕이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 이사야 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예수님은 사역의 모든 순간을 자신의 능력이 아닌 성령님께 의존하셨습니다.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시고, '모략과 재능'으로 그 뜻을 성취하시며, '지식과 경외함'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셨습니다. 성령이 없는 지혜는 교활함이 되고, 성령이 없는 재능은 폭력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한 완벽한 통치자이십니다.

둘째, 주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으로 판단하십니다. 3절과 4절입니다.

  • 이사야 11:3-4,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학벌, 외모, 연봉 같은 눈에 보이는 스펙으로 사람의 등급을 매깁니다. 검증되지 않은 가짜 뉴스나 소문만 듣고 누군가를 매장해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의 정의가 무너진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억울한 자, 가난한 자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십니다. 주님의 공의는 율법의 잣대로 우리를 정죄하는 차가운 법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살리고 일으켜 세우는 구원적 정의입니다.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시는"(5절) 이 신실하신 왕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의 중심을 아시는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대지 3. 그 나라는 적대감을 넘어선 '급진적인 평화'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완성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6절부터 9절은 충격적인 그림을 보여줍니다.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이사야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이것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리는 양을 잡아먹어야 살고, 표범은 염소를 찢어야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의 '약육강식'의 법칙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밟아야 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하는 것이 당연시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본성을 거스릅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습니다.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완전한 평화, '샬롬(שלום)'입니다. 이것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원수 된 것을 허무셨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이리' 같은 직장 상사, '독사' 같은 이웃이 있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평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9절), 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바다 깊은 곳에 잠기듯,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에 푹 잠겨 그분과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 안의 사나운 본성이 사라지고 평화의 사람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12월 7일 대림절 둘째 주일오전예배 설교] 이사야 11장 1절-10절, 절망의 그루터기, 소망의 싹이 트다



결론: 만민의 기호(נֵס, 네스)가 되신 주님께로 모이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10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 이사야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여기서 '기호(נֵס, 네스)'는 전쟁터에서 흩어진 병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높이 세운 깃발을 의미합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백성들에게 "이리로 오라! 여기에 생명이 있다! 여기에 승리가 있다!"라고 알리는 신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향해 높이 들린 구원의 깃발이십니다. 십자가는 절망의 땅에 꽂힌 하나님의 소망의 깃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그루터기처럼 황폐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실패와 상실감에 젖어 계십니까? 고개를 들어 깃발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헛된 위로를 찾아 헤매지 말고, 만민의 기호 되신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이 대림절 기간, 우리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생명력이 여러분의 죽은 것 같은 현실에 새싹을 틔우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화해와 평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여,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그루터기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하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다 잘려 나간 것 같은 제 인생의 그루터기에도 소망이 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비천한 곳에 오셔서 우리의 왕이 되신 예수님, 제 안에 성령으로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내 안의 미움과 분열을 치유하시고, 주님의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 절망의 상황에서도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을 주소서.
  • 우리 가정과 교회에 화해와 용서의 강물이 흐르게 하소서.
  • 전쟁과 분열이 있는 이 땅에 주님의 평화가 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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