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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대림절 넷째 주일오전예배 설교] 이사야 7장 10절-16절, 하나님은 왜 거절당해도 찾아오시는가?

서론: 흔들리는 숲과 같은 우리네 마음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지만, 따뜻한 연말 분위기 뒤편에는 내년 경제에 대한 불안과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숙제들로 잠 못 이루는 분들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믿습니다, 평안합니다"라고 말하며 웃고 있지만, 속마음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롭게 떨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위기가 닥치니 하나님보다 당장 내 손에 잡히는 통장 잔고나 유력한 사람의 전화번호가 더 간절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에 절망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이 "제발 기적을 좀 구하라"고 사정하시는데도, "저는 안 구할 겁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해버린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뻔뻔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신비로운 '징조'를 강제로 쥐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밀어내는 그 순간조차 포기하지 않고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 그 '임마누엘'의 비밀이 오늘 여러분의 두려움을 쫓아낼 것입니다. 본론: 두려움을 이기는 징조, 임마누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성탄을 코앞에 둔 오늘, 우리는 이사야 7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 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1. 위기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민낯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734년경, 남유다 왕국입니다. 당시 왕이었던 '아하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쪽의 이스라엘과 아람(시리아)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유다를 침공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과 백성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성경은 "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사 7:2)라고 묘사합니다. 거대한 태풍 앞에 놓인 나무들처럼, 온 나라가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십니다...

[12월 14일 대림절 셋째 주일오전예배 설교] 누가복음 1장 47절-55절, 비천함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장 47절-55절, 비천함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105장, 오랫동안 기다리던 새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 서론: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을 '기쁨의 주일(Gaudete Sunday)'로 지킵니다. 제단 위의 분홍색 초가 바로 그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 정말 기쁘십니까? 현대인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감정 중 하나는 '상대적 박탈감'입니다. SNS를 보면 나만 빼고 다 행복한 것 같습니다. 남들은 주식이 오르고, 좋은 차를 타고,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합니다. 그 화려함 앞에서 내 인생은 초라해 보이고 비천해 보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더 가져야, 더 높아져야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론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녀는 10대 소녀였고, 가난한 시골 마을 나사렛 출신이었으며,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하여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기뻐할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두려움에 떨어야 마땅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쁨의 노래, '마니피캇'을 부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기쁨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1. 기쁨은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있습니다. 마리아의 기쁨은 환경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누가복음 1:47-48,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여기서 '비천함'은 단순히 가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잘것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은 높고 화려한 곳을 주목합니다. 권력 있는 자, 부유한 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춥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카메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헤롯 왕이 아니라, 갈릴리 시골의 비천한 ...

[12월 14일 대림절 셋째 주일오전예배 설교] 이사야 35장 1절-10절, 광야가 변하여 에덴이 되리라

이사야 35장 1절-10절, 광야가 변하여 에덴이 되리라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새 찬송가 492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서론: 메마른 일상에 피어나는 소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거리에는 화려한 조명이 켜지고 캐럴이 들려오지만, 우리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춥고 시린 겨울일지 모릅니다. 경제적인 한파, 풀리지 않는 자녀 문제, 혹은 내면의 깊은 고독감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마치 물 한 모금 없는 사막처럼 갈라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광야가 기뻐하며 사막에 꽃이 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 말씀이 어떻게 사실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한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예화: 데스 밸리의 슈퍼 블룸 미국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주 접경에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세계에서 가장 덥고 건조하여 생명체가 살기 힘든 죽음의 땅입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타오르는 태양과 바짝 마른 흙뿐입니다. 그런데 2004년 겨울,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례적인 폭우가 이 죽음의 땅에 쏟아졌습니다. 그러자 이듬해 봄,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황토색 흙뿐이던 그 광야가 수백만 송이의 노란 야생화로 뒤덮인 '슈퍼 블룸(Super Bloom)'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식물학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 메마른 땅 밑에는 수십 년간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씨앗들이 있었습니다. 그 씨앗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자 그들은 일제히 깨어나 황무지를 에덴동산처럼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메마른 광야 같아도,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거룩한 씨앗이 심겨 있습니다. ...

[12월 7일 대림절 둘째 주일오전예배 설교] 마태복음 2장 13절-15절, 도망자의 길, 예비된 쉼표 - 우유동굴교회와 연결하여

마태복음 2장 13절-15절, 도망자의 길, 예비된 쉼표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114장, 그 어린 주 예수 새 찬송가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서론 우리는 흔히 '성탄' 하면, 천사들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고요하고 거룩한 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풍경은 조금 다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직후, 그 가정에는 아주 다급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마태복음 2: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짐을 제대로 쌀 겨를도 없이, 캄캄한 밤중에 아이를 안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했던 요셉과 마리아. 그들의 걸음은 축복의 행렬이라기보다, 목숨을 건 '도망자의 길'이었습니다. 뒤에서는 헤롯의 군대가 칼을 들고 쫓아오고, 앞에는 낯설고 먼 이집트 땅이 기다리고 있는 막막한 상황이었지요.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쩌면 이 요셉과 마리아의 거친 숨소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숨소리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벌써 12월입니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바라보며,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해야 할 일은 여전히 산더미 같고, '내일'이라는 염려가 등 뒤에서 우리를 떠미는 것 같지는 않으신지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쉼 없이 달려온 한 해였습니다. "멈추면 안 돼, 뒤처지면 안 돼" 하며 스스로를 재촉하며 살아온 날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차갑고 거친 도망자의 길 위에, 우리를 위해 숨겨두신 따뜻한 '쉼표'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래된 성서의 전승에는 성경의 행간에 숨겨진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전해 내려옵니다. 헤롯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던 그 밤, 마리아가 잠시 멈추어 울고 있는 아기 예수님에게 젖을 먹였다는 '우유 동굴(Milk Grotto)...

[12월 7일 대림절 둘째 주일오전예배 설교] 이사야 11장 1절-10절, 절망의 그루터기, 소망의 싹이 트다

2024년 대림절 두 번째 주일 설교문. 이사야 11장 1-10절 본문 해설. '이새의 줄기'와 '한 싹'의 의미를 통해 절망적인 현실(그루터기) 속에서 피어나는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나라를 선포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하는 진정한 샬롬의 메시지를 통해 위로를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과 정의로운 삶, 가정과 사회의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적용점을 제시합니다. 이사야 11장 1절-10절, 절망의 그루터기, 소망의 싹이 트다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101장, 이새의 뿌리에서 새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 서론: 베어 넘겨진 숲, 그리고 침묵의 시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기다림'의 촛불을 켰습니다. 여러분, '대림(Advent)'은 단순히 성탄절 파티를 준비하는 기간이 아닙니다.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약속 하나만을 붙잡고 새벽을 기다리는 치열한 영적 시간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보십시오. 뉴스를 틀면 들려오는 소식들은 마치 거대한 도끼가 울창한 숲을 무자비하게 찍어 넘기는 것과 같습니다.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고, 경제적 한파는 서민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몹니다. 사회적 갈등과 혐오라는 도끼질에 우리의 마음은 황폐해졌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개인의 삶도 이와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무성한 가지를 자랑하던 나무 같았는데, 건강의 악화, 사업의 실패, 믿었던 사람의 배신, 혹은 자녀 문제라는 도끼에 찍혀 이제는 앙상한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 처럼 느껴지지는 않으십니까? "이제 내 인생은 끝난 것인가? 더 이상 희망은 없는가?"라는 탄식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당시 최강대국 앗수르는 주변 나라들을 닥치는 대로 짓밟으며 유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벌목 기계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공포 앞에서, 다...

[11월 30일 대림절 첫째 주일오전예배 설교] 이사야 2장 1절-5절, 빛으로 오시는 평화: 전쟁의 시대, 대림절을 맞으며

이사야 2장 1-5절을 본문으로 한 2025년의 대림절 첫 주 설교입니다. 전쟁과 갈등의 시대,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평화(שלום)를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서 여호와의 빛으로 걷기를 결단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사야 2장 1절-5절, 빛으로 오시는 평화: 전쟁의 시대, 대림절을 맞으며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새 찬송가 505장, 온 세상 위하 서론: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선명합니다 할렐루야. 대림절 첫 번째 주일, 주님의 전을 찾으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강단에 '소망의 촛불' 하나를 켰습니다. 예배당의 조명을 다 끄고 이 작은 촛불 하나만 남겨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 작은 빛은 더욱 선명하고 간절하게 보일 것입니다. 대림절(Advent)은 바로 그런 절기입니다. 세상이 밝고 화려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너무나 어둡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어둠을 걷어낼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기에, "빛이신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도 그랬습니다. 밖으로는 앗수르 제국이 칼을 갈며 위협하고 있었고, 안으로는 우상숭배와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점쟁이를 찾거나 강대국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습니다. 바로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의 눈을 들어 먼 미래,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질 '어떤 산' 을 보여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도 믿음의 눈을 들어 그 산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본론 대지 1. 비전: 거슬러 올라가는 역설 이사야가 본 비전은 충격적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사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고대 세계에서 산은 신들의 권위를 상징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더 높고 웅장한 산이 있는 나라의 신이 강하다고 믿었습...

[11월 30일 대림절 첫째 주일오전예배 설교] 창세기 38장 24절-30절, 망가진 족보 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 예수님의 족보 속 여인 (1) 다말

대림절 첫째 주일, 창세기 38장 유다와 다말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통해 죄인의 족보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설교합니다. 망가진 인생을 뚫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소망을 발견하는 깊이 있는 묵상을 제공합니다. 대림절과 성탄절까지,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다섯 여인들에 대해 시리즈로 설교 말씀을 준비하고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 38장 24절-30절, 망가진 족보 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함께 할 찬송가 새 찬송가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새 찬송가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새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서론: 기다림의 계절, 불편한 진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거리의 화려한 조명과 캐럴을 들으며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깨끗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성탄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펼친 성경 본문, 창세기 38장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부적절한 관계, 속임수, 매춘, 그리고 사생아의 출산. "왜 하필 대림절 첫 주에 이런 말씀을 보나요?"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를 펴보십시오. 놀랍게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 '유다와 다말'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치장된 거룩함 속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수치스럽고 망가진 삶의 한복판에 오셨다" 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신비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1.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내리막길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38장 1절을 보십시오. 창세기 38: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본문은 제일 먼저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יָרַד, 야라드)..."라고 시작합니다. 유다는 요셉을 파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후, ...

[11월 23일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예 설교] 요한계시록 11장 15절-17절, 영원히 다스리시는 우리의 왕, 예수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인 11월 23일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지킵니다. 교회 절기에 맞춰 요한계시록 11장 15절-17절에서 선언하는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묵상하고 주일오전예배설교문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세상 나라가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비전과 성도의 자세에 대해 설교문을 통해 선포합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17절, 영원히 다스리시는 우리의 왕, 예수 서론: 세상 나라의 소음 속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한 주간은 어떠셨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으로 시끄럽습니다. 뉴스를 틀면 전쟁의 소문, 정치적 다툼, 경제적 위기의 소식들이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마치 이 세상의 힘과 돈과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가?"라는 의문이 들 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놀라운 하늘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입니다.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늘에서 큰 음성이 들립니다. 이 음성은 희미한 예측이 아닙니다. 우주적인 승리의 선포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가 아닌,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본론 1. 소유권의 이전 - 세상 나라는 주님의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되어'(become)입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확정적인 선언입니다. 요한이 환상 중에 들은 이 선포는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마치 부동산 등기 권리증이 넘어간 것처럼, 소유권이 완전히 넘어갔다는 법적인 선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

[11월 16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시편 100편 4절-5절,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축제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감사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라는 사실을 시편 100편 4-5절 말씀을 통하여 설교문으로 정리하였습니다. 환경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섬품인, 선하심, 인자하심, 성실하심에 근거할 때, 고난 중에도 기쁨의 감사의 축제가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증명된 이 영원한 감사의 이유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00편 4절-5절,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축제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성경 본문 시편 100:4-5,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서론: 당신의 감사는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오늘 '감사'라는 단어를 들으실 때 마음이 어떠십니까? 혹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왠지 모를 부담감을 느끼지는 않으십니까? "올 한 해 딱히 감사할 일도 없는데..." 혹은 "작년보다 형편이 더 어려워졌는데 무슨 감사인가..." 우리의 감사는 너무나 자주 '환경'과 '조건'에 묶여 있습니다. 건강하면 감사하고, 자녀가 잘되면 감사하고, 통장이 두둑해지면 감사합니다. 하지만 반대가 되면 어떻게 됩T니? 감사는 순식간에 불평과 원망으로 돌변합니다. 본론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조건부'입니다.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하지만 오늘 시편 100편 기자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사를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선포이며, 조건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기쁨의 감사 축제'로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1. 감사의 문으로 들어가라. 4절은 강력한 4중 명령으로 우리를 압도합니다. "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

[11월 16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골로새서 3장 15절, 성도의 교제 안에 넘치는 감사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골로새서 3장 15절을 본문으로 정리하여 나누는 주일오전예배설교문입니다. 불안과 염려가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평강이 어떻게 우리 마음의 '심판관'이 되는지, 교회가 '한 몸'으로 평강을 누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본문을 통해 배웁니다. 평강의 통치가 가져오는 '감사하는 자'의 삶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 성도의 교제 안에 넘치는 감사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성경 본문 골로새서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서론: 당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심판관'은 누구입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스마트폰을 여셨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까? 밤사이 들어온 주식 시장의 속보였습니까? 아니면 자녀 문제로 인한 깊은 염려였습니까? 혹시 SNS에서 본 누군가의 화려한 삶과 나를 비교하며 시작된 초조함은 아니었습니까? 우리 마음은 텅 비어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무언가가 그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것이 권위 있는 심판관처럼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 행동을 결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도 정작 우리 마음의 심판관 자리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아닌 '세상의 염려'나 '해결되지 않은 분노'나 ‘상대적 박탈감'을 앉혀놓을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평강이 없으니 감사가 없고, 감사가 없으니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또한 '한 몸'으로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우리는 하나 되지 못하고, 날카로운 말로 서로를 상처 입히며 갈등합니다. 이것이 평강을 잃어버린 우리의 비참한 모습,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본론: 평강의 통치, 감사의 열매 오늘 본문 ...

[11월 16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에베소서 2장 8절, 측량 못할 구원의 은혜와 사랑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며 에베고서 2장 8절을 본문으로 한 주일오전예배설교문입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100%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구원받으려 애써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값없는 은혜를 누리십시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선물로 받은 삶을 살아가는 비결을 함께 나눕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측량 못할 구원의 은혜와 사랑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성경 본문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서론: 당신이 받은 가장 비싼 선물 여러분, 혹시 살면서 받아본 선물 중에 가장 비싸거나 기억에 남는 선물이 있으십니까? 아마 값비싼 보석이나 자동차, 혹은 집을 선물로 받는다면 정말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선물도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이 선물'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공짜'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것에 있어서는 '공짜'를 불편해합니다. 특히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라도 열심히 다녀야", "헌금이라도 많이 내야", "착한 일이라도 해야" 구원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이 '행위'의 덫에 걸리기 쉽습니다. 나의 열심, 나의 봉사, 나의 헌신으로 나의 구원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쓰면 애쓸수록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함과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본론 오늘 본문 에베소서 2장 8절은, 그 모든 불안과 노력의 종지부를 찍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언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1%도 들어가지 않은 100%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

[11월 16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능력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을 중심으로 주일오전예배설교문을 정리하였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은 단순한 긍정적인 태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지는 우리의 믿음이며 삶의 태도입니다. 불평을 이기고 진정한 감사를 회복하는 비결을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능력 서론: 감사의 조건 여러분, 우리는 언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합니까? 보통은 우리가 기대했던 좋은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시험에 합격했을 때, 건강을 회복했을 때, 재정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칩니다. 반대로, 일이 꼬이고, 기도 응답이 더디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어떻습니까? 감사가 나오기보다 불평과 원망이 먼저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감사를 '상황의 결과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늘 '조건부'입니다. 좋은 날씨에만 감사하고, 비 오는 날에는 불평합니다. 본론 그런데 오늘 바울 사도는 이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 즉 극심한 '박해와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명령을 선포합니다. " 범사에 감사하라 " (18절 상반절) '범사'에 말입니다. 좋은 일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만약 가능하다면,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상황을 뛰어넘는 '감사의 능력'을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1. 감사는 감정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오늘 본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감사할 기분이 들면 감사하라"고 말...

[11월 16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23절, 새 아침을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삶의 잿더미,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드리는 희망의 노래.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을 통해,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낄 때에도 결코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인자(חסד, 헤세드)와 긍휼(רחמים, 라하밈)을 발견합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이 십자가 안에서 어떻게 우리의 '새 아침'이 되는지 선포하는 설교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23절, 새 아침을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성경 본문 예레미야애가 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서론: 끝이라고 느낄 때 성도 여러분, 혹시 "이제 정말 끝이다"라고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잿더미 위에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을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어쩌면 그것은 끔찍한 사고나 질병의 진단일 수도 있고, 처절한 사업의 실패나 실직의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으로 관계가 파탄 났을 때일 수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죄의 굴레 속에서 "나는 안 되는구나" 좌절할 때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애가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 쓰인 슬픔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불탔고, 나라는 망했으며, 백성들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참혹한 현실 속에서 3장 1절부터 20절까지, 칠흑 같은 어둠 속의 고통을 토해냅니다. " 그가 나를 이끌어 어둠 속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3:2), " 내 영혼이 평강에서 멀리 떠났으니 내가 복을 내어 버렸으며 "(3:17)라고 절규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마주하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