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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23절, 새 아침을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삶의 잿더미,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드리는 희망의 노래.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을 통해,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낄 때에도 결코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인자(חסד, 헤세드)와 긍휼(רחמים, 라하밈)을 발견합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이 십자가 안에서 어떻게 우리의 '새 아침'이 되는지 선포하는 설교입니다.


[11월 16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23절, 새 아침을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23절, 새 아침을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함께 할 찬송


  • 새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성경 본문


  • 예레미야애가 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서론: 끝이라고 느낄 때


성도 여러분, 혹시 "이제 정말 끝이다"라고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잿더미 위에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을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어쩌면 그것은 끔찍한 사고나 질병의 진단일 수도 있고, 처절한 사업의 실패나 실직의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으로 관계가 파탄 났을 때일 수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죄의 굴레 속에서 "나는 안 되는구나" 좌절할 때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애가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서 쓰인 슬픔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불탔고, 나라는 망했으며, 백성들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참혹한 현실 속에서 3장 1절부터 20절까지, 칠흑 같은 어둠 속의 고통을 토해냅니다. "그가 나를 이끌어 어둠 속에서 걸어가게 하시고"(3:2), "내 영혼이 평강에서 멀리 떠났으니 내가 복을 내어 버렸으며"(3:17)라고 절규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마주하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났다"라고 결론 내리는 절망입니다. "하나님마저 나를 버리셨구나." 이 절망이 우리를 영적으로 '진멸'시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희망이 사라진 잿더미 한복판에서, 선지자는 놀라운 반전의 고백을 터뜨립니다. 21절입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도대체 무엇을 마음에 담았기에, 이 절망 속에서 소망을 발견한 것일까요?

그 답이 바로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입니다. 우리 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 예레미야애가 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오늘은 이 위대한 고백을 통해,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우리에게 새 아침을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본론


1. 절망 속의 반전: 끝나지 않는 사랑

첫째로, 하나님은 절망 속에서도 결코 '끝나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선지자는 지금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된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진멸'되어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잿더미 속에서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완전히 망했지만, '아직(Still)' 숨이 붙어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회개를 잘해서입니까? 우리가 의로워서입니까? 아닙니다. 선지자는 분명히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여기서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 Hesed)'입니다. 이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언약 즉 약속에 기초한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자격이 없어도, "내가 너와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책임감 있는 사랑입니다.

'긍휼'은 '라하밈(רחמים, Rachamim)'입니다. '자궁'에서 유래한 단어로, 어머니가 태 속의 생명을 느끼는 듯한 본능적이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 '헤세드'와 '라하밈'이 어떻다고요? "무궁하다"(לֹא־תָמְנוּ, 로 타므누). '결코 끝나지 않는다',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수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넘어져도 여전히 '성도'라 불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와 라하밈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끝나지 않는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폭발한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진멸'되어야 할 그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진멸'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찢으시는 '라하밈'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우리와의 '헤세드'(언약)를 지키셨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나의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확증입니다. 

혹시 지금 삶의 잿더미에 앉아 계십니까?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다"는 절망 속에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당신이 아직 숨 쉬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끝나지 않았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2. 매일의 기적: 새롭게 하시는 성실함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끝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침마다 새롭게' 부어집니다.

23절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이 고백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예루살렘의 아침은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뜨면 어제 무너진 성벽과 불탄 집들, 잃어버린 가족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 절망의 아침에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새롭다"고 선포합니다.

'새롭다(חדשים, 하다쉼)'는 것은, 어제 썼던 사랑을 재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밤새의 모든 절망과 죄악을 덮고도 남을 만큼, 오늘 아침 완전히 신선하고 새로운(Brand New) 은혜가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23절 하반절이 그 이유입니다.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성실하심'은 히브리어로 '에무나(אמונה, Emunah)'입니다. '견고함', '신뢰할 만함', '흔들리지 않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할 때의 그 어근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조석으로 변합니다. 우리의 결심은 작심삼일로 끝납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에무나', 성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해가 아침에 뜨는 것보다 더 확실합니다. 아니, 해가 뜨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증거입니다.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반드시 아침이 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헤세드'는 우리의 어떤 절망의 밤도 뚫고 반드시 '새 아침'을 가져옵니다.

그렇다면, 이 '새 아침'의 궁극적인 성취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깊고 어두웠던 밤(십자가의 죽음)을 뚫고, 주님은 부활의 '새 아침'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하다쉼)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의 실패에 갇혀 있지 마십시오. 어젯밤의 절망에 주저앉아 있지 마십시오.

오늘 아침, 당신이 눈을 떴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새로운 '헤세드'와 '라하밈'을 이미 준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오늘은 어제와 다른 '새 아침'입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그 새로운 은혜를 받아 누리십시오.



결론: 성실하신 하나님을 붙들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레미야처럼 삶의 잿더미에 앉을 때가 있습니다. "이제 끝이다"라고 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외칩니다. 아니,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22절).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피로 증명되었습니다.

아니, 매일 새롭게 시작됩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23절). 그 은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매일 아침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단 하나의 이유, "주의 성실하심(에무나)이 크시도소이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당신의 밤이 아무리 깊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새 아침'은 반드시 옵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께 당신의 절망을 가져오십시오. 십자가에서 확증된 그분의 끝나지 않는 사랑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오늘 아침, 나에게 새롭게 부어주시는 부활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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