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스데반의 기도, 바울의 심장에 박힌 용서의 화살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회심이 다메섹 도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영적 씨앗이 심긴 곳은 사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이었습니다. 당시 사울이라 불리던 청년 바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며 그들의 옷을 맡아주던 잔인한 방관자이자 주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바울의 귀에 꽂힌 잊을 수 없는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스데반의 입술에서 나온 기도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바울은 그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해 저토록 평안하게 용서를 빌 수 있는가? 하지만 훗날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스데반의 그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가 바로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용서의 메아리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본론
오늘 이 새벽, 고난주간 다섯 번째 날을 맞이한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속에도 혹시 '아직 풀리지 않은 매듭' 하나씩은 있지 않으십니까? "저 사람만큼은 절대로 용서 못 해", "내가 당한 억울함은 죽어도 못 잊어"라는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고, 가슴 한구석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과거가 너무 부끄러워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영적 몸살'을 앓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오늘 본문은 그 모든 미움의 사슬과 정죄의 감옥을 부수는 강력한 용서의 진원지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주님은 가장 비참한 십자가 위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1. 무지를 덮는 중보의 사랑
예수님은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는 그 찰나의 순간에 보복의 저주가 아닌 중보의 기도를 아버지 하나님께 올리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4절에서 예수님께서 외치신 "사하여 주옵소서"는 헬라어 미완료 과거 시제로, 한 번의 외침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드린 기도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못 박는 망치 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이는 분이 누구인지, 자신들이 짓는 죄가 얼마나 참혹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 무지함조차 긍휼의 근거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주님은 율법의 '눈에는 눈'이라는 공의를 넘어, 당신의 몸을 제물 삼아 '죄악에는 용서'라는 새로운 은혜의 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이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은 내 인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저의 무지함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만 가능합니다. 오늘 새벽, 여러분의 미움을 주님의 중보 기도 속에 던져버리십시오. 주님이 이미 다 갚으셨습니다.
2.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왕
이어서, 십자가 아래의 군중과 관리들, 그리고 심지어 한쪽의 행악자까지도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외치고 있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 누가복음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골고다에 모인 구경꾼들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네가 능력이 있다면 그 나무에서 내려와 네 가치를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사탄이 했던 유혹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려오지 않아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왕은 신하를 죽여 자신을 살리지만, 만왕의 왕은 자신을 죽여 원수를 살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구원'의 본능을 거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끝까지 매달려 계셨던 그 '무력함'이야말로 죄의 권세를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능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늘 "나의 옳음"과 "나의 능력"을 증명하려 애씁니다. 조롱 당하면 참지 못하고, 무시 당하면 두 배로 갚아주려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은 자존심을 증명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통치를 신뢰하며 묵묵히 견디는 길입니다. 내 자존심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내 안의 그리스도가 비로소 일하십니다.
3. 죽음의 문턱에서 열린 낙원의 문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기적은 죽어가는 강도의 회심입니다.
- 누가복음 23:42-43,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 옆의 강도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곁에 계신 예수님이 무죄한 왕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아무런 선행도, 공로도 쌓을 시간이 없었던 그에게 주님은 즉각적인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보다 더 완벽하고 시급한 복음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류를 갈라놓는 심판대였습니다. 한 강도에게는 거치는 돌이었으나, 다른 강도에게는 생명의 문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도 한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주'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나는 너무 늦었어", "내 죄는 너무 깊어"라고 절망하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는 늦은 때란 없습니다. 진심 어린 한마디, "주님,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고백이면 충분합니다. 그 고백이 시작되는 오늘이 바로 여러분의 인생이 낙원으로 변하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결론: 십자가 밑에서 짐을 풀고, 낙원의 숨을 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골고다 언덕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용서의 강물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한 중보의 기도, 조롱을 참아내신 침묵의 순종, 그리고 강도에게 베푸신 파격적인 구원의 약속이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며 여러분을 복음의 초청 자리로 초청합니다. 여러분을 옥죄고 있는 정죄감, 타인을 향한 독한 미움, 삶의 무게 때문에 터져 나오는 비명을 모두 십자가 앞에 쏟아 놓으십시오. 성령님께서 이 시간 우리 마음의 빗장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을 이긴 용서의 깃발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 그 약속을 붙들고, 주님의 따뜻한 품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복된 고난주간 새벽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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