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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4일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9장 35절-10장 8절, 일꾼입니까 -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

[2026년 6월 14일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9장 35절-10장 8절, 일꾼입니까 -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



서론: 공감의 시작


“주님, 제가 아직도 일꾼일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의 따뜻한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에 조용히 내려앉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참 바쁘게 살아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직장과 가정, 수많은 관계와 교회의 일들이 마음속에 가득 차,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먼저 지치곤 합니다. 요즘 많은 성도님이 “특별한 문제는 없는데 기운이 없고, 기도는 해야겠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고백하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믿음이 없고 헌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스스로 자책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이런 영적 무기력과 죄책감에 눌릴 때가 많습니다. 봉사가 힘들면 충성심이 사라진 것 같아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왜 이렇게 게으르냐”며 매섭게 몰아세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은 지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깊은 시선을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무리의 겉모습이나 종교적인 성실함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생하고 기진한 그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오늘 우리의 설교가 시작됩니다. 우리 주님은 지친 이에게 일을 떠맡기시는 분이 아니라, 지친 이를 가장 먼저 불쌍히 여기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 제목인 “일꾼입니까”에 무거운 부담을 느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너는 내 눈에 가장 깊이 담긴 사람이며, 바로 그런 너를 통해 세상을 살리고 싶다”는 따뜻한 음성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소모품이 아니라 ‘먼저 사랑받은 사람’으로 부르시고, 그 풍성한 사랑을 누린 자를 비로소 동역자로 세워주십니다.



본론


오늘 우리는 이 은혜의 음성을 따라 세 가지 걸음을 함께 걷고자 합니다.

  • 첫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합시다.
  • 둘째, 복음 안에서 '일꾼'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봅시다.
  • 셋째, 평범한 일상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순종들을 붙잡아봅시다.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한 걸음씩 주님의 음성을 따라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1대지: 하나님의 마음 발견

예수님은 고생하고 기진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늘 삶의 구체적인 현장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역들을 움직인 가장 깊은 원동력은 36절에 등장하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쌍히 여기심’은 가벼운 동정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긍휼의 원어인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을 의미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내 뼈저린 아픔으로 느끼는 절절한 사랑입니다.

주님이 보신 우리의 ‘고생과 기진함’은 매일의 삶에 치이고 쫓기며, 겉으로는 웃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책임은 무거운데 기댈 곳이 없어 마음의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된 우리를, 예수님은 지금도 바라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쓸모없다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스스로를 향한 엄격한 자책을 내려놓으십시오. 지금의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견뎌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대단한 믿음의 길을 걷고 계시며, 주님은 그 눈물겨운 순종을 다 보고 계십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를 ‘목자 없는 양’ 같다고 표현합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어 쉽게 길을 잃는 양들을 주님은 탓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처지를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역의 실적이나 헌신의 성과표가 아닌, 오직 품에 안아주고 싶은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실 뿐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를 통해 타인을 위로하는 사람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흠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넘어져 아파보고 주님의 긍휼을 배운 이들을 들어 쓰십니다. 눈물을 아는 이가 우는 자의 곁을 지키고, 넘어져 본 이가 실족한 자의 손을 아프지 않게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일꾼은 먼저 주님의 품안에서 위로받고 회복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충성보다 주님의 긍휼이, 우리의 땀방울보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먼저인 줄 믿습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우리의 신앙은 곧바로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신다”가 앞설 때, 우리는 다시 기쁘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2대지: 복음 안에서의 새로운 관점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을 다르게 보시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고생하는 무리를 보시며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7절과 3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마태복음 9:37-3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우리가 현실의 절망과 ‘문제’에 집중할 때, 복음은 그 똑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능성과 ‘추수할 곡식’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할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을 원망하는 눈이 아니라, 추수할 곡식을 바라보는 복음의 시선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에 주눅 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장 밭으로 뛰어 들어가라 하지 않으시고, 가장 먼저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라”, 즉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일꾼의 사역은 내 힘을 쥐어짜는 행동이 아니라, 기도로 주인 되신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기도 없이 시작한 열심은 결국 나를 탈진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긍휼 없는 충성은 타인을 정죄하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기 쉽습니다.

이 밭의 주인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 진리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줍니다. 온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지거나 모든 문제를 내 손으로 해결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저 보냄을 받은 일꾼일 뿐입니다.

부름받은 제자들의 면면은 지극히 평범하고 부족했습니다. 주님은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하셨듯이, 주님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필요한 권능과 지혜의 채우심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부족함을 핑계 삼아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아직 내 마음에 두려움이 남아 있고 눈물이 마르지 않았어도 괜찮습니다. 주님은 그 연약함 그대로 우리를 부르셔서, 다른 이들의 마른 눈물을 닦아주는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3대지: 일상에서 누리는 작은 승리

마지막으로, 주님의 일꾼은 소박한 일상의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키며 능력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가 딛고 선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작은 징표’가 되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거창한 계획 대신 일상의 세 가지 작은 태도의 변화를 시작해 봅시다.

첫째, 내 주변 사람들을 예수님의 긍휼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까칠한 직장 동료나 지친 이웃을 보며 ‘저 사람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생하고 기진한 영혼이구나’ 하고 한 호흡 멈추어 긍휼의 눈길을 보내는 것입니다.

둘째, 짧지만 깊은 기도로 주인의 마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출근길이나 일상 중에 조용히 마음으로 “주님, 오늘 제가 주인 노릇 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 만나는 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따뜻한 미소를 전하게 하옵소서”라고 짧은 탄식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거저 받은 은혜를 내 주변에 거저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와 사랑을 대가 없이 나누는 것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기, 묵묵한 경청,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당하는 궂은일처럼 작은 순종의 겨자씨들이 모여 울창한 하나님 나라의 숲을 이룹니다.

주님은 10장 10절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마태복음 10: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우리 주님은 우리의 한계와 필요를 채우시는 참 좋으신 목자이십니다. 주님 안에서 쉬어가는 것은 불충성이 아니라, 더 오래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배터리를 충전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가 성도님들에게 참된 안식과 회복의 도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적용: 작지만 확실한 순종


이번 한 주, 아주 작은 순종 한 가지만 실천해봅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듣고 너무 무거운 다짐을 하기보다, 이번 한 주간 딱 한 가지만 진실하게 실천해 봅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이렇게 한 문장만 기도해보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 제가 만나는 사람들을 긍휼의 눈으로 보게 하시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따뜻한 은혜 한 자락을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이 떠올려 주시는 한 사람에게 격려 문자 한 통을 보내거나, 가족들에게 부드럽게 대답하는 것과 같은 작은 은혜를 베풀어 보십시오. 주님은 이 소박한 순종을 결코 작다 하지 않으시고 소중히 받으사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열매로 자라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결론: 소망의 선포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먼저 바라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는 긍휼로 불쌍히 여겨주셨으며, 이후 영광스러운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 누린 우리는 억지로 일하는 종이 아닙니다. 거저 받은 은혜가 너무 벅차 세상에 사랑을 거저 흘려보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영광스러운 동역자입니다.

이번 한 주간, 밭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모든 무거운 짐을 맡겨드리고 기도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작은 순종을 들어 써서 놀라운 생명의 추수를 이루실 하나님과 기쁘게 동행하시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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