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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6일 주일 예배 설교] 요한복음 10장 1절-10절, 나는 양의 문이라 - 부활절 네 번째 주일

서론: 공감의 시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지나며 맞이하는 네 번째 주일 아침입니다. 봄날의 따뜻한 햇살이 우리 예배당 창문을 넘어오듯,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맑고 다정한 은혜가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의 지친 마음마다 가득하게 스며들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20여 년간 성도님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목회의 길을 걸어오면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치열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성도님들과 차를 나누며 깊은 속이야기를 듣다 보면, 참 많은 분의 어깨가 무겁다는 것을 느낍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습관처럼 일터로 향하고, 가족을 돌보며, 각자에게 주어진 무거운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하루하루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데도, 문득 찾아오는 무력감에 마음이 덜컥 주저앉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제 서재 책상에는 늘 작은 묵상 노트가 한 권 놓여 있습니다. 평소 책을 읽거나 말씀을 묵상하다가 마음에 닿는 글귀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두는 노트인데, 며칠 전 그 노트를 들추다 이런 문장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너무 빨리 달리기 때문에,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시간을 주지 못한다 ." 참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달리고 있지만, 정작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려 허무함이 밀려올 때가 많습니다. 본론 하나님은 이렇게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우리를 결코 정죄하시거나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왜 더 잘하지 못했느냐고 책망하는 대신, 그 무거운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으시며 우리의 쉴 곳이 되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은, 세상의 속도에 지친 우리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초대장입니다. 1. 하나님의 마음 발견: 우리를 품으시는 '양의 문' 첫째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7절에서...

[2026년 4월 19일 주일 예배 설교] 누가복음 24장 13절-35절, 내 인생의 엠마오 - 부활절 세 번째 주일

서론: 공감의 시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창밖으로는 완연한 봄기운이 가득한데,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시린 겨울바람이 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많은 분들과 조용히 차를 나누며 대화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가 있습니다. 바로 ‘번아웃’과 ‘무력감’입니다. 우리는 모두 참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신앙생활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달려왔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 에너지가 방전된 것처럼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영적인 감각마저 무뎌져 버린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써왔나 " 하는 깊은 허탈감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제자의 발걸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작은 마을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어깨는 무겁게 축 처져 있었고, 얼굴에는 슬픈 빛이 가득했습니다.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허망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실패감과 영적인 번아웃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엠마오로 가는 길은, 오늘날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우리들의 인생길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절망으로 점철된 이 길 위에서 놀라운 반전이 시작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지친 마음을 다독이시며 다가오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을 함께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마음 발견 본문 15절을 보면, 두 제자가 서로 이야기하며 슬픔에 잠겨 걸어갈 때, 예수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눈이 가리어져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24:15-16,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우리가 영적으로 깊은 침체에 빠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 시야가 ...

[2026년 4월 12일 주일 예배 설교] 베드로전서 1장 3절-9절,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부활이 빚어내는 산 소망 - 부활절 두 번째 주일

도입: 타락한 상황의 초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이 한 주 지난 오늘,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부활의 기쁨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주일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게 됩니다. 아침마다 펼쳐지는 뉴스는 경제 불안, 사회 갈등, 국제적 긴장 등의 부정적인 소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고백합니다. "목사님, 예배 시간에는 은혜를 받지만, 월요일만 되면 다시 무거운 현실이 덮쳐 옵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에 소망을 걸어봅니다. 경제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대하거나, 스스로의 강한 의지로 목표를 세우면 삶이 달라질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이 주는 무게는 우리의 소망을 허공에 흩날리는 연기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건강 하나만 무너져도, 관계 하나만 틀어져도 우리가 공들여 쌓아 온 성취와 계획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립니다. 자기 힘으로 붙잡으려는 소망은 결국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 만족은 늘 짧고 불안은 늘 길게 이어집니다. 이토록 철저히 타락하고 무능력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단 하루도 참된 소망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본문 해석: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과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초대 교회의 성도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 신자들은 로마 제국 곳곳에 흩어져 나그네로 살고 있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재산을 잃고, 직장을 잃기도 하는 등 믿음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손해와 고난을 동반했습니다. 세상적 조건으로는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편지의 서두에서 원망이나 탄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선포합니다. 그는 인간의 상황이 아닌, 하나님께 소망의 근거를 두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산 소망'입니다. 신학자 위어스비(Warren W. Wiersbe)는 "산 소망은 과거의 부활, 현재의 믿...

[2026년 4월 5일 부활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27장 57절-61절, 고요함 속에서 피어나는 소망 - 부활주일

서론: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어둠이 충분히 깊을 때에야 비로소 별을 볼 수 있다 ."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의 마지막 새벽,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깊은 어둠의 자리인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 위의 처절한 비명과 군중의 조롱은 이제 멈췄습니다. 남은 것은 차가운 정적과 무거운 바위 문뿐입니다. 사실 우리 삶에도 이런 '무덤의 시간'이 찾아오곤 합니다. 열심히 기도했지만 취업 실패 통보를 받은 후의 정적,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돌아온 텅 빈 거실의 고요함, 혹은 '읽음 확인'은 떴는데 도무지 답장이 오지 않는 관계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바로 이 때, 우리의 입술에서는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지요. 본론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침묵의 현장을 조명합니다.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그 무덤 속에서,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반전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고요한 어둠이 사실은 부활의 별을 보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임을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두려움을 뚫고 나온 고귀한 헌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끝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57절과 5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57-58,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자 부자였습니다. 당시 분위기에서 처형당한 죄수, 그것도 빈역죄와 더불어 신성모독죄로 몰린 예수의 시신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내건 위험한 도박이었습니다. 그는 '숨은 제자'였으나, 모두가 도망친 가장 어두운 순간에 비로소 ...

[2026년 4월 3일 성 금요일 예배 설교] 누가복음 23장 33절-43절, 십자가 위에서 흐르는 용서 - 성 금요일(Good Friday)

서론: 스데반의 기도, 바울의 심장에 박힌 용서의 화살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회심이 다메섹 도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영적 씨앗이 심긴 곳은 사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이었습니다. 당시 사울이라 불리던 청년 바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며 그들의 옷을 맡아주던 잔인한 방관자이자 주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바울의 귀에 꽂힌 잊을 수 없는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스데반의 입술에서 나온 기도였습니다.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 바울은 그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해 저토록 평안하게 용서를 빌 수 있는가? 하지만 훗날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스데반의 그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가 바로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용서의 메아리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본론 오늘 이 새벽, 고난주간 다섯 번째 날을 맞이한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속에도 혹시 '아직 풀리지 않은 매듭' 하나씩은 있지 않으십니까? "저 사람만큼은 절대로 용서 못 해", "내가 당한 억울함은 죽어도 못 잊어"라는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고, 가슴 한구석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과거가 너무 부끄러워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 영적 몸살 '을 앓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오늘 본문은 그 모든 미움의 사슬과 정죄의 감옥을 부수는 강력한 용서의 진원지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주님은 가장 비참한 십자가 위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1. 무지를 덮는 중보의 사랑 예수님은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는 그 찰나의 순간에 보복의 저주가 아닌 중보의 기도를 아버지 하나님께 올리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

[2026년 3월 29일 주일오전예배설교] 이사야 50장 4절-9절, 왜 왕이신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셨는가 - 종려 주일

서론: 공감의 시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의 문을 열며 제가 평소 곁에 두고 줄을 쳐가며 읽던 교회사 책의 한 페이지를 여러분과 천천히 나누고 싶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생각하기보다, 오늘은 이 이야기 하나에만 우리 마음을 가만히 머물게 해봅시다. 4세기 경, 위대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에게 한 철학자가 편지를 보내 기독교의 핵심 진리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답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첫째 덕목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며, 셋째도 겸손입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 방대한 신학적 지식이나 탁월한 성취가 아니라, '겸손'을 전부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능력을 맹신하며 교만 속에서 깊은 방황을 겪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통제하려 했을 때, 그는 오히려 짙은 무력감과 영적인 피로감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낮아지심을 만난 순간, 지친 영혼은 비로소 참된 쉼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삶의 무게를 버텨내려 안간힘을 씁니다. 세상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성과를 내어 스스로를 증명하라고 끊임없이 다그칩니다. 그 차갑고 쫓기는 걸음 속에서 우리는 정서적 번아웃에 빠지고 영혼을 소진시켜 버립니다. 지난 한 주간도 그 팍팍한 세상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견뎌내느라 참으로 애 많이 쓰셨습니다. 본론 하지만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의 자리에서만큼은 그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복음의 밝고 따뜻한 빛으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오늘은 왕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화려한 마차를 타고 위압적으로 군림하지만, 우리 주님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몰아세우는 대신, 가장 낮은 곳에서 지친 우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려 오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사야 50장의 말씀...

[2026년 2월 22일 주일오전예배설교] 로마서 5장 12절-19절, 실패한 자리에서 시작된 승리 - 사순절 첫째 주일

서론: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사순절의 첫 번째 주일을 맞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최근 우리가 접하는 국제 정세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위태롭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포화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강대국 리더들의 결정 하나하나가 전 세계의 경제와 안보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며 우리는 종종 무력감을 느낍니다. "나 한 사람이 열심히 산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질까?"라는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평범한 시민들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몇몇 지도자들의 오판과 탐욕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고통받고, 난민이 발생하며, 물가가 치솟아 우리의 식탁까지 위협받는 현실을 목격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한 결과가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힘의 논리에 의해 내 삶이 휘둘리는 이 구조적 모순 앞에서 우리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도 감람산에 앉아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며 비슷한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 24: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언을 넘어,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이 필연적으로 겪게 될 고통의 구조를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거대한 죄의 시스템, 그 속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을 보시며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본문은 바로 이 문제의 근원을 파헤칩니다. 왜 세상은 끊임없이 전쟁과 고통 속에 있는가? 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고통받아야 하는가? 성경은 이것이 단순히 정치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영적 원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