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흔들리는 숲과 같은 우리네 마음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지만, 따뜻한 연말 분위기 뒤편에는 내년 경제에 대한 불안과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숙제들로 잠 못 이루는 분들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믿습니다, 평안합니다"라고 말하며 웃고 있지만, 속마음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롭게 떨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위기가 닥치니 하나님보다 당장 내 손에 잡히는 통장 잔고나 유력한 사람의 전화번호가 더 간절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에 절망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이 "제발 기적을 좀 구하라"고 사정하시는데도, "저는 안 구할 겁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해버린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뻔뻔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신비로운 '징조'를 강제로 쥐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밀어내는 그 순간조차 포기하지 않고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 그 '임마누엘'의 비밀이 오늘 여러분의 두려움을 쫓아낼 것입니다. 본론: 두려움을 이기는 징조, 임마누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성탄을 코앞에 둔 오늘, 우리는 이사야 7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 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1. 위기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민낯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734년경, 남유다 왕국입니다. 당시 왕이었던 '아하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쪽의 이스라엘과 아람(시리아)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유다를 침공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과 백성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성경은 "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사 7:2)라고 묘사합니다. 거대한 태풍 앞에 놓인 나무들처럼, 온 나라가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십니다...
누가복음 1장 47절-55절, 비천함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105장, 오랫동안 기다리던 새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 서론: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을 '기쁨의 주일(Gaudete Sunday)'로 지킵니다. 제단 위의 분홍색 초가 바로 그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 정말 기쁘십니까? 현대인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감정 중 하나는 '상대적 박탈감'입니다. SNS를 보면 나만 빼고 다 행복한 것 같습니다. 남들은 주식이 오르고, 좋은 차를 타고,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합니다. 그 화려함 앞에서 내 인생은 초라해 보이고 비천해 보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더 가져야, 더 높아져야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론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녀는 10대 소녀였고, 가난한 시골 마을 나사렛 출신이었으며,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하여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기뻐할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두려움에 떨어야 마땅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쁨의 노래, '마니피캇'을 부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기쁨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1. 기쁨은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있습니다. 마리아의 기쁨은 환경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누가복음 1:47-48,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여기서 '비천함'은 단순히 가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잘것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은 높고 화려한 곳을 주목합니다. 권력 있는 자, 부유한 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춥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카메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헤롯 왕이 아니라, 갈릴리 시골의 비천한 ...